산악인으로 설악에 살며 평생 인술 펼쳐온 이기섭 박사
  • 등록일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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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으로 설악에 살며 평생 인술 펼쳐온 이기섭 박사
흰 가운 주머니에 늘 들어있던 사탕 하나

 
설악산은 우리 산악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국적 알피니즘’의 무대이자 도전의 대상이었다. 설악산을 본격적으로 산악인들이 오르게 된 건 불과 60여 년도 되지 않지만 그 속에서 우리 산악계는 빠르게 성장해갔고 작고 낮은 산을 발판으로 높은 산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런 속에서 바탕이 된 건 산사람들의 늘 뜨거운 가슴이었다. 뜨겁다는 건 산을 향한 열정뿐 아니라 동료에 대한 우정,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설악산을 오르며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이 있다. 알피니즘을 휴머니즘으로 살다 간 고(故) 이기섭 박사(1913~2006)이다.

흔히 ‘속초의 슈바이처’ ‘영동의 허준’으로 불리어온 이기섭 박사의 직업은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탄탄대로 출세의 길을 놔두고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택했던 천상 산악인이었다.

1913년 황해도 수안에서 출생한 선생은 해주고보 4학년이던 1931년 식민지 교육 반대 등을 주장하며 학우들과 단식동맹휴학을 벌이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정도로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당시 학생 60명이 퇴학당하며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기록될 만큼 반향이 컸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선생은 이후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국내의 다른 학교로 편입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에서 고등교육과정을 마친 뒤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34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에 진학한 그가 의사를 진로로 선택한 것은 어릴 적 일찍 여읜 모친의 영향이 컸다. 시골에서 의료혜택 없이 방치된 환자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졸업 후 연구실에서 근무하며 주말이면 가깝게는 도봉산, 광릉 등지와 멀리 금강산, 묘향산 등지를 찾아다니기도 했던 선생의 산악인으로서의 삶은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 광복 후 적십자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며 한국 의학의 초창기를 다져온 선생은 여순반란사건, 백범 김구 시신 검안 등 굵직한 현대사 속에도 있었다. 6.25전쟁 중에는 서울에 남아 나라와 체제를 넘어선 인간 생명을 존중하며 국군과 북한군을 번갈아 치료하기도 했던 선생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이대부속병원장에 취임하는 등 우리나라 중견 의료인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1960년 4.19학생의거와 함께 혼란해진 정국 속에 선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명예와 부를 내려놓고 홀연 작은 어촌마을 속초로 떠났다. 당시 한국산악회 이사와 안전대책위원장, 또 서울산악회 회장을 맡아 북한산 백운산장을 짓는 등 산과 함께 살았던 선생에게 1957년 처음 와봤던 설악산은 줄곧 가슴에 남아있던 그리움이었을 테다.

이기섭 박사가 속초에 와서 한 일은 그의 90평생을 적는 것처럼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들다. 다만 산악운동에 앞서 선생은 병원을 개업하고 환자들을 먼저 돌봤다.

1963년 8월 서울산악회‧관동산악회와 함께 하기산간학교를 연 것은 선생이 설악산에 와 처음 벌인 산악활동이었다. 이듬해엔 양폭과 천불동계곡에 다리를 놓아 등산로를 개설하고 이와 함께 영동지방을 통한 설악산 등산이 비로소 대중화될 수 있었다. 1965년 설악산악회 창립과 66년부터 시작한 설악제 등산대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지역의 중요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의사인 만큼 산 아래서 선생의 역할은 컸다. 산에 오르다 부상당한 산악인들은 선생의 보살핌을 받고 일어났으며, 그중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앞에 선생은 가슴아파했다. 1969년 10동지조난 때에도 선생은 만사를 제쳐두고 구조작업에 함께 했다.

지역에서의 입지 때문인지 1969년 설악산케이블카를 운영하는 설악관광주식회사에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지만 1년도 안되어 자리를 내놓은 선생은 곧이어 설악자연보호협의회를 창립, 설악산의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후 1975년 속초보건소장과 속초도립병원장을 역임했던 선생은 1982년 모든 직책을 버리고 자연인으로서의 의사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시작한 것은 산골 무의촌을 돌며 이후 21년간 의료봉사를 한 것이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왕진 가방을 들고 버스를 갈아타며 오지마을을 찾았던 이기섭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선생은 올 때마다 계란 하나에 빵 하나를 가지고 와 점심으로 먹으며 마을 사람들의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선생의 흰 가운 주머니에는 늘 껌이며 사탕 같은 주전부리가 들어있었는데, 진찰을 하지 않더라도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걸 하나씩 건넸다는 것이다.

그의 사후 대청봉이 올려다 보이는 청초호 한쪽에 세워진 추모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산과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 이기섭 박사의 묘’
산골마을의 사람들이 20여 년간 매주 건네받았던 그 작은 사탕은 어쩌면 어떤 의술보다도 큰, 사람에 대한 애정에 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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