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로 날아온 ‘부산 갈매기’ 곽수웅
  • 등록일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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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날아온 ‘부산 갈매기’ 곽수웅
가슴 속에 산을 품은 대륙의 사나이

 
78kg에 육박하는 체중에, 철저하게 뼈에다 비계를 얽어맨 듯한 육체의 소유자. 간혹 산행 시 누가 “야, 돼지야” 할 것 같으면 기다 렸다는 듯이 “그런 말 마소. 돼지 치고 이래 날씬한 돼지가 있던가 요?”하고 되받아치던 그. 바위 타기는 비상한데 할 줄 아는 노래 라고는 ‘잘란다 잘란다’ 하는 노래 밖에 몰라, 자기 집에 불이 나도 “잘란다 잘란다” 할까 걱정. 한번 틀어지면 ‘죽어도 다시 못 볼’ 정 도로 융통성 없는 꽈배기 공장장 같은 성격. 도리 납작한 얼굴에 능글능글한 웃음을 담고 아가씨들을 메주 쥐어박듯 쿡쿡 쥐어박 는 데는 글쎄라, 총각 제대가 쉽지는 않으리라….

이는 1970년 대륙산악회 회지인 <산울림>에 ‘나사 빠진 빈 항고’라 는 필명을 쓰는 회원이 게재했던 칼럼에 실린 곽수웅(郭秀雄·71) 씨에 관한 글이다. 대륙산악회 창립 이듬해인 1959년에 고등학생 의 신분으로 입회했던 곽씨는 70년대 초반 당시 등반기술위원장 을 6회나 역임했을 정도로, 등반에 관해서는 산악회 내에서 독보 적인 존재였다. 타고난 체력과 강단으로 산악활동에 주력했던 그 는 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에 대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이후의 그는 해외의 고산은 쳐다보지 않고 철저하게 대륙산악회 를 중심으로 한 국내 산행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77 에베레스트’ 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꼬리표이고, 또한 한평생을 산에서 보낸 그 에게 산 그림자는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낙인과도 같다. 그래서 산사람들은 아직도 ‘부산 산꾼’하면 ‘곽수웅’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출장 차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을 한 건 당 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매몰찬 거절을 몇 번이나 당한 후에야 어렵사리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꽈 배기 공장장 같던 예전의 그였다면 젊은 패기로 계속 밀어붙이는 기자 또한 메주 쥐어박듯 쿡쿡 쥐어박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님의 말씀을 기다릴 뿐 정상에 오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대륙산악회 입회, 6~70년대 산악회 부흥 이끌어
“대륙산악회에 입회하면 가장 먼저 천마산을 올랐어요. 그 아래에 살고 있는 회원들이 많았거든요. 거길 오른 다음에야 금정산으로 갈 수 있었죠.”

약속장소인 용두산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곽수웅씨가 맞은편 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대륙산악회는 성산(작고) 씨가 원래 ‘삼천리 탐승회’로 활동하던 모임을 재정비해 1958년에 만든 산악회로, 창립 당시에는 회원이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회원이 하나둘 늘어 그 해 말에는 5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곽씨가 대륙산악회에 입회한 것도 이 무렵이다.

“4남4녀 중에 일곱째고, 형제 중엔 막내에요. 국민학교 다닐 때 사 변이 터졌죠. 정신없는 세월인데도 시근이 없어 먹고 사는 걱정은 모르고 산으로 갔어요.”

그의 첫 산행은 동계 태백산·함백산 등반으로, 1960년 1월의 일 이었다. 겁도 없이 계획만 거창할 뿐, 당시 회원들은 태백산에 대 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장비만은 철저하게 갖 춰야 한다고 생각해 군용장비의 천국이었던 자갈치시장에 가 양 말부터 안면동상 방지용 마스크까지 모두 구입했다. 이것저것 다 갖추다보니 륙색의 무게가 엄청났는데, 성산 선생이 회고록에서 ‘처음 나온 곽수웅 대원이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게 무척 걱정 스러웠다’고 따로 적을 만큼 고등학생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새벽에 강원도 동점 역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딱 죽겠더라고요. 선배라고 짐을 더 지는 것도 없고, 후배라고 봐주지도 않더라고요. 참 고생 많이 했지요.”

 
그렇게 오른 태백산 정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 이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당시 산에서 고3 학생 장건웅(대구공고 산악부)씨를 만났는데, 또래에다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중간에 서로 바빠 소 식을 모른 채 지낸 기간이 10여년 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50년 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잊지 못할 첫 산행 이후 그는 점점 산에 빠져들어 혈기왕성한 청년 시절이었던 60년대에 대륙산악회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톡 톡히 했다. 당시 산악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시민안내등산, 지리산 칠선계곡 답사, 부산학생등산대회 개최, 부산산악연맹창 립 등의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이어갔는데, 곽씨는 언제나 그 중심 에서 활동하던 열혈 회원이었다.

1969년에는 이례적인 행사가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산악회가 한 국의 산으로 원정등반을 오게 되어 당시 부산 산악계의 대부였던 신업재(한국산악회·작고) 선생에게 도움를 요청했고, 이에 선생 은 대륙산악회에 그 안내를 부탁해 10월 10~17일에 한일 합동으 로 지리산을 등반했다. 이때의 인연은 1971년 대륙산악회가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일본 북알프스에 교환등반을 가는 것으로 이 어졌다. 기대로 가득 찬 해외원정이었지만, 1년이 넘는 그 준비과 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말도 마소. 당시에 내가 모든 행정을 맡아봤는데, 7명이 단체로 출국하는 이변이 처음이라 일본영사관에서도 ‘크라이밍 비자라는 건 유례가 없다’면서 애를 태우는기라요. 그때 골병 들어서 막 몸 살이 나고 그랬어요.”

그렇게 힘들게 이룬 일본행이었기에 대륙산악회는 욕심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총 21일간의 원정에서 성산 대장과 곽수웅 부대장, 그리고 3명의 회원들은 쯔루기다케(3003m)와 다테야마 연봉, 북 알프스 최고봉 호다카다케(3190m) 등을 올랐고, 큐슈 지역에서 3 천 미터급 봉우리 7개 등을 오르는 등 원 없이 등반을 하고 돌아왔 다. 그렇게 다녀온 이듬해에 성산 선생과 울산 지역의 산을 찾았던 그는 ‘우리라고 해서 산에 알프스라는 이름을 못 붙일 이유가 뭐 냐’는 생각이 울컥 들었다. 그래서 울산 일대의 1천 미터가 넘는 연 봉에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에야 누구라도 그 이 름을 부르지만, 당시에는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고 했다.

“막상 이름을 짓기는 했는데 10년이 넘도록 산악인들한테 먹히지 를 않았어요. 우리도 괜시리 부끄러워서 그냥 있었더니 사람들이 서서히 불러주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봉우리에 지나지 않던 산들 이,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사람들에게 와서 알프스가 되었다.

 
내가 바로 원조 ‘히말라야 휴먼 알피니스트’
1975년 겨울. 그는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77 에베레스트 원정대도 훈련 차 그곳으로 와 두 팀은 만나게 되었다. 이후 김영도 대장의 눈에 띄게 된 그는 에베레스트 훈련대 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다른 대원들은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해왔는데, 나는 2년밖에 같이 훈련을 안했어요. 늦은 합류와 지방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훈 련 기간에는 다른 대원들과 약간의 기 싸움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선발을 통해 원정대원의 라인업이 확정된 이후에는 그 같 은 일이 싹 사라졌다고 했다. 원정대에서 그가 맡은 부문은 수송과 포장. 어린 시절 선친이 국제시장에서 양과자점을 운영해 포장 일 을 많이 도왔던 터라 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묶던 그였다. 오죽하면 칭찬에 인색한 김영도 대장으로부터 “곽군이 참 잘 한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말로 세계최고봉에서 한 국인의 기상을 뽐낸 원정대였지만 “당시 원정대의 분위기는 일사 불란과 거리가 멀었다”고 곽씨는 회상했다. 2~30대의 젊은이들 로 이루어진데다, 해외원정이라곤 모두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 도 했을 거라는 짐작이 갔다. 어쨌든 그는 뛰어난 고소적응력과 넘 치는 힘에도 불구하고 1차와 2차에 공격대원으로 뽑히지 못한 채 2캠프까지 등반한 것으로 원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원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에 불과했다.

“철수를 해야 하는데, 당시 나와 같이 2캠프에 있던 한국방송 (KBS)의 김광남 기자가 항문탈장으로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 거 에요. 줄을 묶어서 게걸음으로 걷는 그 양반을 데리고 내려오는데, 그런 고생이 또 없었어요.”

열 발짝 걷다가 쉬고, 또 열 발짝 가고. 그런 식으로 내려오니 이미 다른 대원들은 그들을 지나쳐 저만큼 앞질러 가버리기 일쑤. 위태롭게 아이스폴을 내려올 때는 김 기자가 크레바스에 빠지는 작은 사고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곽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상 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온 이후에는 김씨의 텐 트에 함께 머물며 당시 4캠프에 있던 의료담당 조대행 대원에게 무 전으로 처치방법을 전해 듣고 열흘간이나 그를 보살폈다. 곽씨의 극진한 간호 덕에 김씨의 항문 밖으로 10cm가 넘게 튀어 나왔던 살점이 쑥 들어갔다고 했다.

그의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베이스캠프를 철수하고 하행카 라반을 시작할 때 동상으로 걸음이 불편한 박상렬 부대장의 곁을 끝까지 지킨 것도 바로 그였다.

“해외원정등반에서 필요한 건 뛰어난 기술이나 체력이 아닌 것 같 아요. 양보와 배려, 그게 더 중요한 덕목이라는 걸 그때 느꼈지요.” 그렇게 다녀온 이후에는 더 이상 해외원정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원정 당시 사용했던 6인용 텐트와 쇠줄사다리, 주 마 등을 산악회에 공동장비로 기증 해버렸다.

그는 사실 72년부터 산보다는 동굴에 더욱 정열을 쏟아, 삼척 환선 굴과 관음굴, 박쥐굴 등을 눈 감고도 답사할 수 있을 정도의 베테랑 이었다.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곽씨는 동굴탐사에 더 열중했고, 후 배들과 함께 활동하던 대륙산악회 동굴탐사반을 한국동굴협회에 정식 가입시키며 학술단체로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자신은 참여를 안했지만, 대륙산악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 기 위해 후배들이 꾸린 ‘87-88 캉첸중가 원정대’의 기금 마련을 위 해 지역 기업체로부터 당시 2천만원이라는 후원금을 유치하기도 했다.

그렇게 종횡무진 산과 동굴을 누비던 그도 가정을 꾸리고, 먹고살 기 위해 여러 사업을 하고, 또 나이를 먹어가며 차츰 그 자리를 후 배들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가장 원로가 된 지금까지도 산을 대하 고 대륙산악회를 생각하는 그 마음만은 처음 입회했던 고등학생 시절에서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산밖에 모르는 외골수에 부당함은 못 참는 쓴소리꾼
해질 무렵 용두산공원을 내려온 우리는 국제시장 안에 그가 단골 로 찾는 수목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그의 오랜 지인인 이진영씨와 친구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곽 대장 오셨는 가?”하고 건네는 그들만의 인사법에는 평생을 산만 쳐다보고 살아 온 친구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듬뿍 배어있었다.

부산에 왔으면 여기 회는 꼭 먹어야 한다며 내온 광어를 앞에 두고 술 이 몇 순배 돌자, 그의 특기인 ‘돌직구’ 화법도 슬슬 시동이 걸렸다. “나는 옛날에도 모범적인 산악회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자 부합니다. 가끔 보면 나이 먹었다고, 돈 좀 있다고 산악 단체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는 큰 감투라도 쓴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산사람은 산으로만 말하고 보여주면 되는 건데.”

그는 평소 입 바른 소리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와 만 나기를 껄끄러워 하거나 피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데고 독설을 날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주위로부터 “꼬 드기기 제일 힘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융통성 없고 입이 무거운 편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거나 산을 다니는 데 필요한 기본적 인 예의나 태도를 지키지 않거나, 그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 되면 참지 못하고 쓴 소리를 내뱉고 마는 것이다.

“근래에 산에 가보니 개똥같은 산에서도 히말라야급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나도 젊은 시절에는 최신식 장비들만 갖췄 는데, 그때 사용하던 것들은 지금도 새것처럼 쓸 수 있어요. 등산 장비라는 건 제대로 관리를 하고 물 흐르듯 써야 그 가치가 빛나 는데 요즘은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마구 소비하는 것 같아 안타까 워요.”

“요새 연맹이나 산악단체들이 다양한 행사를 많이들 하는데, 그중 에는 불필요한 보여주기식 행사도 많더라고요. 산 사람들에게 새 로운 길을 제시하고 보급하는 게 그런 단체들이 할 일인데, 너무 정치적으로 변한 게 아닌가 해서 씁쓸할 때가 있어요. 또 산악계는 특히 다른 곳보다 나이 먹은 사람을 일찍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손실이라고 봐요. 내가 죽고 나면 부 산 산악계의 역사에 대해서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술에 취해 목소리는 격앙되고, 뚜렷한 주제 없이 이말 저말 중언부 언하는 와중에도 그는 최근 산악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현안 들에 대해 콕콕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중간 중간에 “늙은 꼰대가 하는 잔소리 재미없지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재미 로 들을 말이던가.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순 없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었다.

밤이 늦어 왁자지껄한 거리로 나왔을 때 그는 많이 취해 있었다. 하지만 비틀비틀하는 걸음에도 대륙의 무게를 오롯이 담고 있는 눈빛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이 곧 “평생을 바친 나의 산”이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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