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리 경상도 산 아지매 여정숙씨
  • 등록일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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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리 경상도 산 아지매 여정숙씨
앞으로 애 안고, 뒤로는 짐 매고 산에 다녔어요

 
부산 산악계에 ‘여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클라이머가 있다. 여포 라고 하면 건장한 체구의 남자 클라이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별명의 주인공은 건장한 체구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여포’라 불리는 여정숙씨는 부산 지역의 여성 클라이머 1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암벽 등반에 입문하던 당시, 부산에서는 여성 클라이 머가 거의 없었다.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암벽 등반의 세계 에 들어온 여정숙씨의 산 이야기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스물한 살 때 처음 산을 갔어요. 첫 산행치고는 어려운 월악산이 었죠. 너무 힘들어서 다리를 못 올릴 정도였죠. 두 손으로 내 다리 를 들어가면서 올라갔어요. 다녀와서 집에서는 ‘쟤는 이제 다시는 산에 안 갈거야’라고 말했었는데, 그 뒤로도 어찌하다보니까 계속 산에 가게 됐어요.”

여정숙씨는 구두를 사러 갔다가 ‘우리들의 산’이라는 책자를 보고 ‘우리들의 산 산악회’에 입회했다. 우연히 산과 연을 맺었듯 첫 등 반도 그렇게 다가왔다. 산악회를 따라 다니면서 꾸준히 워킹 산행 을 해오던 여정숙씨가 암벽등반을 접한 건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 를 낳은 뒤이다. 당시 우리들의 산 산악회에서는 등산학교를 운영 하고 있었고, 여정숙씨는 교육생은 아니고 밥을 해주러 갔었던 것. “등반 인원이 한 명 모자랐어요. 나보고 등반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됐죠. 금정산은 뒷동산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청바지 입고 농구화 신은 채로 가서 무명 리지를 등반했어요. 해보니까 잘 되고, 재미있더라고요. 벨트 사고 신발 사고 하면서 등 반을 시작했죠.”

육아와 가사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직접 암장까지 운영할 정도로 등반에 전념한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남자 들에 대한 반항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땐 암벽 등반하는 여자들이 별로 없었어요. 남자들 틈에 혼자 끼어서 다니다보니까 구박도 많이 받았죠. 등반을 같이 다니다 보 면 키 큰 남자하고 키 작은 여자하고 다를 수밖에 없어요. 선배들이 ‘니는 안 된다. 내려온나. 니는 이 코스 못하겠다’ 이러니까 오기가 생겼어요. ‘두고 보자. 저거 꼭 올라간다’ 생각하고 집에 가서 누우 면 홀드가 눈앞에 보여요. ‘여기에서 어떤 자세로 올라가면 되겠다’ 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했어요. 나중에 가서 딱 붙어보면 되는 거예요. 또, 실내암장에서도 운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죠. 그때 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냥 혼자서 게걸음 하듯이 붙어 서 가는 거예요. 그게 운동의 다였죠.”

 
4~5년은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미쳐서 등반 다니면 힘든 것도 모른다”는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금정산 대륙봉까지 뛰어갔 다 와서 밥하고 청소해놓고, 암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견딜 만큼 암벽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아기가 백일 지나마자 애 데리고 산에 다녔어요. 앞으로 안고, 뒤 로 짐 매고 다녔죠.”

여정숙씨가 그때를 회상하며 암장 한쪽에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 켰다. 그녀는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등에 근육이 많네요”라 며 조용히 웃었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등반을 해내는 그녀를 두 고 ‘여자이기를 포기했다’해서 여포냐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녀는 그런 적이 없다. 오히려 남자들보다도 더 부지런히 산을 다녔다. 부 산에서 등산학교 강사를 할 때, 여자 강사는 그녀 혼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직접 강사들 밥도 하고, ‘줄 거는 일’도 도맡아했다.

“경찰 특공대를 교육시킬 때, 제가 선등을 서니까 밑에서 전부 ‘봐 라 저리 작은 여자도 올라가는데 우리가 못 올라가겠나’ 이러는 거 예요. 그때 부채바위 크랙을 등반 했어요. 크랙으로 가다가 한번 턱 을 넘어서서 사선 크랙이 있고, 오버행이 있어요. 이 턱을 넘어서야 하는데 언더홀드도 작아요. 그거 잡고 재밍해서 넘어가야 하는데 여기에 손을 딱 넣으면 몸이 돌아요. 그러면서 손 놓고 떨어지는 거 죠. 아무리 남자라도 등반 경험이 없으면 쉽게 못 올라오죠. 낑낑대 는 교육생들한테 ‘특공대 맞습니까? 아, 특공대 아니네.’라면서 놀 렸어요. 너무 많이 놀리니까 ‘어지간히 놀리시죠’ 이러는 거예요. ‘에, 그래도 그렇지, 남잔데.’ 이러면서 또 놀렸죠. 학생들은 남자 강사가 등반을 시범 보이면 ‘당연히 하는 거겠지’ 생각하지만, 여자 강사가 시범을 보이고 나면 등반이 어렵다는 걸 금방 깨달아요. 그 래서 여자 강사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부산에서 여성 클라이머로 활발히 활동하던 여정숙씨가 김해로 옮 겨온 건 7년 전이다. 2006년은 여정숙씨에게는 안 좋은 일이 연이 어 일어났던 해이다. 캐나다 스쿼미시 원정훈련 중에 추락을 해서 머리를 다치기도 했고, 연이어 다치는 등 여러 불상사가 겹쳤다. 그 러면서 결국 부산에서 하던 암장마저 정리하게 된 것이다. 여정숙 씨가 김해에서 다시 암장을 차릴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동갑내기 친 구인 고 김광훈씨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참 고마운 친구죠. 그 친구 아니었으면 전 암장도 안 하고 산만 다 녔을 거예요.”

고 김광훈씨는 김해 클라이머스 소속이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산 에 다녀서 아는 게 많았다. 리지 길을 잘 몰랐던 여정숙씨는 그와 함께 리지 등반을 다니면서 친해졌다. 지금의 암장은 고 김광훈씨 가 운영하던 사업장의 사무실이었다. 한편, 여정숙씨가 처음 김해 에 들어오려고 할 때에 ‘좁은 김해 바닥에서 암장 두 개가 생길 이 유가 뭐있냐’는 반대도 있었다. 그렇게 들어오려고 몇 번 시도를 하 다가 취소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김해 클라이머스의 선배 인 이규범씨의 인정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김해에 들어올 수 있었 다. 여정숙씨는 “앞으로 김해 지역에서 입지를 굳혀 나가면서 후배 양성에 더 힘쓸 생각”이라고 한다.

“김해에 와서 보니까 부산하고는 또 분위기가 달라요. 김해에는 산 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더라고요. 지금 운동하는 회원들 중에 워킹 산행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있어요. ‘5.14’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5월 14일에 만들었나?’ 이러거든요. 요새는 산 모르는 사 람들을 ‘산쟁이’로 만드는 재미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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