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영의 삼정 휘발유 스토브
  • 등록일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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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산장에 도착해 배낭을 열어본 이호영(어쎈트산악회·한국산악회 산악기술위원회)의 손길이 순간 멈춰 선다. 배낭 속에 고이 들어있어야 할 버너가 보이지 않았던 것.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분명 세석산장에서 꿀맛 같은 밥을 해 먹고 나서 놓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3시간이 넘게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억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밥심'으로 산을 오르던 그가 배고픔을 참으며 앞으로 남은 여정을 이어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세석산장에 도착하니 어느 새 하늘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다행히 그가 찾던 버너는 산장에서 잘 보관해 두고 있었으나 비박을 하며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힘들게 되찾은 버너로 해 먹는 밥은 그야말로 눈물 젖은 밥. 그리고 그는 이 낡은 버너의 원래 주인이던 선배를 문득 떠올렸을 것이다.

산에서는 서로 줄을 묶는 사이는 피가 섞인 혈연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애보다 끈끈한 사이더라도 선배와 후배 사이의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 산에서 막내들의 꼭 챙겨야 하는 장비는 바로 버너, 코펠, 로프 세 가지. 이제 막 20대 후반에 접어든 이호영씨는 언제나 막내 자리를 도맡으며 이 핵심장비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
혼자서 자취를 하는 후배가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앞으로도 밥 잘하라고 준 것인지 그에게 선배가 선뜻 내어준 것이 바로 1997년 출시된 삼정 휘발유 스토브. 불을 지피려면 5분 이상 끙끙대며 씨름해야 하는 낡은 버너였지만 그에게는 귀중한 살림살이이자 선배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선물이었다. 지난해 큰맘먹고 새 버너를 구입하면서 이제는 쓸 일이 없어졌지만 손때 어린 추억이 반질반질 윤이 날 만큼 묻어있다.

아직 자신보다 어린 후배가 없어 막내신세를 면치 못하는 그도 언젠가는 '하늘같은 선배'가 될 것이다. 그 때는 행동을 먼저 보여줄 수 있는, 솔선수범하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작은 바람이다. 언젠가 선배가 내어준 낡은 버너에 해 먹던 밥이 그에게 위로의 힘이 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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