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pinist-‘히말라야의 히피’ 더그 스코트
  • 등록일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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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밍은 종교처럼, 예수처럼 순수했다. 그러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던 그 종교를 부르짖으며 어린이를 강간하는 성직자가 나오는 것처럼, 처음엔 순수했던 클라이밍도 국가의 이해와 요구에 따르고, 서로 경쟁을 하고, 안전을 위해 볼트를 박는 것과 같이 변질되고 있다. 모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그 스코트(Douglas Keith Scott)는 단호하게 알피니즘의 초심을 말했다. 그를 두고 현대 탐험등반의 개척자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1941년 영국 노팅엄에서 태어난 스코트는 12살 때 근교 그롬포드의 블랙 록에서 첫 등반을 경험한 이후 지금까지 20세기 등반사에 획을 긋는 모험과 고산거벽등반에 평생을 바쳐왔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창가방 동릉, 매킨리 남벽, 바인타브락 서릉 초등과 캉첸중가 북릉, 쉬블링 동릉, 시샤팡마 남서벽, 롭상 스파이어, 바룬체, 참랑 등의 알파인스타일 신루트 등반 등 그가 지금까지 아시아의 고산을 무대로 올랐던 등반만 45개에 달하며 그중 40개의 정상에 섰고 또 절반은 초등이거나 신루트 등반이었다.
한때 덥수룩한 수염과 치렁치렁한 머리, 둥근 철테 안경으로 꼭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을 연상시키며 ‘히말라야의 히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더그 스코트. 그러나 그는 탐험과 등반에 바친 평생을 인정받아 1994년 대영제국훈작사 작위를, 1999년 왕립지리학회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영국산악회(TAC)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0년 티베트 타르고리 초등 후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 등반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국제산악연맹 내에서 전통등반(Traditional Climbing) 자문위원을 맡아 등반 철학과 방법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왔다. 황금피켈상 심사위원회는 지난 2010년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카트만두에서 열린 국제산악연맹 총회장에 나타난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네팔에서 열린 국제산악연맹 회의장에서 만난 현대 히말라야 등반의 개척자 더그 스코트. 그는 인터뷰 전 꼭 녹음을 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히말라야 등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서 그는 앞선 것처럼 말했다. “1905년 처음 히말라야에서 등반활동이 시작됐을 때에 비해 현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그 와중 영국의 에베레스트, 이탈리아의 K2, 독일의 낭가파르바트와 같이 히말라야에 내셔널리즘이 스며들기도 했고, 또 과거에 비해 등반 방식과 속도, 규모가 급격히 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등반을 통한 순수한 즐거움이다. 정부의 규제에 따라야 하고, 서로 경쟁해야하고, 일신의 안전을 위해 볼트를 박는 건 나쁜 일”이라고 스코트는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영국의 등반가들은 아직도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등반하며 인기나 명예,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17세 되던 1958년 처음 알프스로 건너가 알파인 등반을 경험했던 그는 1965년 티베트의 샤드 원정에 참가해 히말라야를 경험한 뒤로 교사로 일해오던 것을 그만두고 평생을 산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1972년 봄 헤를리히코퍼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와 그해 가을 크리스 보닝턴의 같은 원정대에 참가하게 된 건 그가 경험했던 첫 8000m로 이후 1975년 영국인 최초로, 또 세계 최초로 남서벽을 통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게 된다. 소규모 알파인 스타일과 대규모 극지법 등반을 둘 다 경험했던 그는 이후 알파인 스타일 쪽으로 자신만의 등반을 펼쳐가게 되는데, 요즘 히말라야 등반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꼬집었다.
“8000m 14봉이 가장 인기 있는 대상지인 것은 사실이다. 봄가을에는 등반을 피해야 할 정도로 북적인다. 하지만 클라이머라면 누구든 8000m급 산을 오르고 싶어 할 테니 이 같은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지금 히말라야 등반의 문제는 대부분의 등반이 8000m 14봉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6000m급도 매력적인 산이 많다. 등반가들이 이런 곳에 골고루 분산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 대규모등반을 지양하는 것도 중요하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를 때 정상 부근에서 비박하고도 건재하게 돌아왔던 그는 이듬해 매킨리와 배핀섬의 거벽들을 넘어뜨리고 나서 1977년 다시, 이번엔 자신이 대장이 되어 보닝턴 등과 함께 파키스탄의 바인타브락을 찾지만 거기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하산 중 두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기어 내려와야 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욱 선명한 알파인 등반이지만 스코트는 여전히 “개인적인 취향은 스포츠 등반보다 전통적인 등반을 더 선호하며, 이것이 더 창의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할수 있기 때문”이라며 “고산에서도 고정확보물을 사용하지 않고 등반하는 것이 곧 머메리즘”이라고 덧붙였다.
그 또한 1979년 알파인 스타일 신루트로 캉첸중가를 등정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은선의 등반에 대한 견해도 물어보았지만 스코트는 정작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설명을 듣고 “영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최근 국제산악연맹에서 힘을 기울이고 있는, 빙벽등반경기의 동계올림픽 종목 채택에 대해선 “얼마 있지 않아 종목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올림픽위원회가 결정할 일이며, 만일 채택이 된다면 경쟁을 좋아하는 어린 클라이머들과 그 부모들은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덧붙여 “그래도 나는 개인적으로 클라이밍이 경쟁과는 상관없는 것이면 좋겠다. 나는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 결과, 정상, 초등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누가 더 좋은 모험(Good adventure)을 했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1977년 파키스탄 바인타브락을 초등하고 하산 중 두 다리가 부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더그 스코트는 등반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좋은 모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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