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탐험 - 오사무 다나베
  • 등록일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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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무 다나베는 우에무라 나오미 이후 일본 산악계의 맥을 잇는 알피니스트라고 할 만큼 첨예한 등반을 여러 번 해온 인물이다. 그는 2008년 열린 아시아황금피켈상 후보에 오르며 한국을 처음 방문했었는데, 2006년 겨울 일본 로체 남벽 원정대 대장으로 팀을 이끈 것과 함께, 자신이 2차 등정조로 난공불락의 남벽을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한국 산악계에도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그을린 얼굴, 거친 수염, 그 속에 빛나는 눈동자에선 결코 하루 이틀 만에 덧바를 수 없는
산에서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건 세로쓰기로 된 빛바랜 고전을 들췄을 때 맡았던 냄새와도 같았다.

1980년 나가노 현의 신슈대학교(信州大學)산악부에서 등반을 시작한 오사무 다나베는 1982년 가네시히말3봉(7111m·현재는 2봉으로 바뀜) 등반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5차례 히말라야 등반대에 참가했다. 늘상 텔레비전이나 스포츠신문을 장식하는 최단, 최대, 최고의 잣대로 본다면 30여년의 세월동안 25차례라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는 8000m급 고산이라곤 고작 11번을 등정했고 개수로는 9개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그의 행보에서 읽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다. 오사무 다나베가 오른 8000m급 봉우리 9개 중 4개는 신루트 등정과 동계초등 등의 특별한 기록을 갖고 있다. 7000m급에서는 로부체캉, 갸지캉, 란타출리 등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의 산들을 초등했고, 지난 가을에는 미답봉이던 네팔의 리줌(7050m)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기도 했다. 1박2일간 함께 야리가다케(3180m)를 오르며 나눈 그와의 짧은 대화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이 듬뿍 묻어나와 내심 내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산을 오르는 동안의 침묵에서 나는 그 걸음에 담긴 진정한 산꾼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탈을 오르내리는 그의 몸짓은 신중하고도 가벼웠으며, 후줄근한 차림새 속에서도 눈은 빛났다. 그와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한국말에 능통한 본지 일본통신원 우치노 가오리씨의 도움으로 산에서 내려와서야 이루어졌다. 첫 질문은 “어떻게 산을 접하게 되었는가?”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행사로 이곳 야리가다케를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 산을 접하게 됐고, 대학교에 들어가 산악부에도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와 관련한 일을 해본 적은 없으며, 대학 3학년 때 학교산악부에서 꾸린 가네시히말 원정대에 참가한 이후 줄곧 히말라야를 오갔고,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아직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등산가이드라고 소개했는데, 주로 60대 여성들을 상대로 산행을 안내해주며, 스스로 가이드라는 것을 따로 광고하지 않기 때문에 한두 명을 데리고 1년에 5~6번 정도만 북알프스를 찾을 정도로 그다지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느냐? 아내의 반응은 어떠냐?”고 묻자 그는 “아내는 내가 등산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적게 버는 대신 조금씩만 소비하고 사는 데 익숙해져 괜찮다”고 말했다. 지난 로체 남벽 등반 때도 그의 아내는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했었다. 다나베는 “아내는 한국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서 텔레비전도 자주 보지만, 난 지금까지 아키하바라(일본 최대의 전자상가)에도 딱 한번, 그것도 등반 중 쓸 무전기를 사기 위해서 가봤다”고 말했다.
이메일도 없다는 그에게서 다니구치 지로의 산악만화 <신들의 봉우리>의 주인공 ‘하부 조지’가 떠올랐기에 그 책을 본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었다. 책에서 주인공은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뒤로하고 네팔에서 소박한 삶을 살며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단독으로 시도한다. 그는 대신 북알프스를 무대로 한 이노우에 야스시의 50여년 전 소설 <빙벽>은 여러 번 읽었다고 말했다. 세로쓰기로 된 빛바랜 고전을 우연히 들췄을 때 맡았던 냄새가 그에게서 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산행 중 다나베는 신은 지 20년 쯤은 되어 보이는 낡은 가죽등산화에 빛이 바랜 80년대 스타일의 빨간 배낭, 손에는 공사장에서 쓰는 목장갑을 끼고 이제 나오지도 않는 가지다(Kajitax) 피켈을 들고 있었는데, 그런 반면 복장은 나머지 장비를 전부 팔아도 사기 힘들 것 같은, 꽤 명품으로 알아주는 값비싼 브랜드를 입고 있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었다. “스폰서가 있는가?” 묻자 꼭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몇해 전부터 일본 몬츄라에서 등산복을 후원받고 있습니다만 돈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갈 땐 주변 산악인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때문에 저는 여러 산악회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신슈대학교산악부OB회와 일본산악회 등 큰 규모의 산악회는 재정이 좋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또 일본히말라야협회와 지역의 토카이산악회에서도 크고 작은 지원을 해줍니다. 이런 도움들이 있을 땐 10만 엔에서 30만 엔 정도 개인비용을 들이고, 그렇지 않을 땐 1백만 엔 정도 돈을 털어 등반을 갑니다.”
오사무 다나베는 1997년 K2 등반 때 첫 대장을 맡은 이후 대부분 팀을 꾸려 등반을 했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라 때론 대원으로도 참가했었다. 가고 싶은 산이 있는데, 어떤 곳에서 등반대를 꾸린다고 하면 지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에게 ‘다나베 대장’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저는 히말라야에 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좋습니다. 그때 그때 가고 싶은 산, 가고 싶은 루트를 정하고 나면, 그 산에서 제일 효과적인 등반 방식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선택합니다. 그것이 알파인 스타일이라면 그렇게 시도를 하고, 극지법이라고 판단되면 또 그렇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등반스타일은 “꼭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등반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첫 8000m 14봉 등정 이후 한국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14봉 등정자 4명을 보유한 산악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그의 생각은 어떤지, “일본은 산악선진국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일본은 아직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사람이 없다.
“오은선씨는 행운 있는 산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어떤 의미로 본다면 선진국이라 할 수 있고, 달리 보면 아닙니다. 일본에는 고산의 어려운 루트를 등반할 수 있는 클라이머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고, 또 어느 곳을 오른다 한들 사회적 반향을 거의 찾을 수 없어 한편으론 선진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일본에는 매년 히말라야에 계속 갈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산악인이 없다며 한국 산악인들이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롭게 등반하는 것 같아 부럽다고 했다. 자신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동계초등하거나 로체 남벽을 처음으로 모두 돌파했을 때에도 산에서 내려와 강연 요청 한번 들어온 적 없고, 생활에서 달라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다나베는 지금까지 일본 내에서 스포츠 분야와 관련한 상을 몇 번 받았지만 메달이 전부라고 덧붙였다. 지난 산행 중 산장에서 다나베를 알아본 주인은 2천 엔짜리 와인 한병을 선물로 주었었다. 다나베는 “나는 조금 유명하지만, 산꾼들 사이에서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14봉을 전부 오른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 목표는 처음부터 14봉이 아니었다. 만일 그게 나의 목표였다면 메스너 이후 고작 스물 몇 번째 등정자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현재 12개를 오른 다케우치가 조만간 일본 첫 14봉 등정자가 될 테지만, 그건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일 뿐 이후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거기에 응대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고작,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등반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 정보를 어떻게 얻으며, 누구와 함께 등반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7~8년 전에 나온 <히말라야 명봉사전>이나 <산과 계곡>에서 나오는 <암과 설> 등의 잡지에서 기본적인 정보를 얻습니다. 하지만 주로 한 봉우리를 등반할 때 얻는 주변 산들의 사진과 정보에서 다음 목표를 고를 때가 많습니다. 강한 대원들을 모아야 할 땐 수소문을 해서 함께 등반하자고 편지를 보내 설득합니다. 처음 본 대원과 함께 등반했던 경우도 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당신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그 또한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산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이고, 또 나를 실험하며,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에 가면 갈수록 나는 가난해진다. 그래서 아직까지 자가용도 없다”며 인터뷰를 마쳤던 오사무 다나베는 다음 날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이 타고 왔던 버스를 얻어 타고 가미코지 아래 대중교통이 다니는 터미널까지 함께 내려갔다. 햇살 부서지는 차창 밖, 손그늘을 하고 줄곧 다른 손을 흔들고 있던 일본 최고의 알피니스트를 보며 문득 예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생각났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 사회에서 부자가 진정한 산악인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과도 같은 것인가. 주머니 속 정상의 개수를 세지 않는 가난한 알피니스트에게 산은 더 광활히 펼쳐진 것이니. ⓜ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야리가다케 정상부를 등반 중인 오사무 다나베. 그에게 한국에 바위를 하러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자신은 고전적인 알파인 등반이 더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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