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탐험 - 박영석
  • 등록일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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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좌를 모두 오른 사람들에 대해 산악계와 사회의 시선은 포폄이 엇갈린다. ‘세계적인 산악인’ ‘산악강국으로서 위상을 높인 자’라는 칭송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일부에선 그들의 등반이 성과주의에 치우친 결과라며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단순히 ‘14좌’를 모두 오른 것에 대해 기자의 시선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다. 그 오름짓이 한 개인에게는 전부를 차지하는 극한의 체험일 수 있으나, 그것들이 이 철저한 자본의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정신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볼 때 회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알피니스트의 삶은 이념보다 행위에 무게가 실려 있으며, 그들의 몸짓은 늘 꿈과 자유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세속의 어떤 일보다 숭고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알피니스트의 잣대와 세상의 잣대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너무나 크게 벌어져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행위 대부분은 내용보다는 결과와 그 ‘기록’으로만 대중에 전해지고 이로 인해 높낮이로 평가되는 게 ‘산악 강국’의 현실이다. ‘한국의 대표산악인’으로 불리는 박영석의 기사를 읽으며 우리는 어떤 행간을 보아왔을까.

984년부터 박영석이 꾸리거나 참가해 올랐던 해외의 고산들은 59곳에이른다. 14좌’를 위해 그는 29번이나 8000m급 원정대를 꾸렸으며, 에베레스트의 경우 통산 8번을 원정해 각기 다른 루트로 3번 정상에 섰다.

“그랜드 슬램 순간 족쇄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14좌를 다 오르는 순간 더 이상 이런 진부한 등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뻤고, 북극점에 도달하는 순간 발목을 채우고 있던 족쇄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산악그랜드슬래머’ 박영석은 어느 날 소주잔을 비우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진심이었을까.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해 함께 북한산을 오르면서도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산악그랜드슬램’이란 8000m급 14좌와 7대륙최고봉, 남북극점을 모두 밟는 일을 뜻하는 말로, 그가 이 세 가지를 모두 해내며 나온 신조어다. 그의 행보는 ‘인류 최초’라는 말로 수식되고 있는 터였다. 그런 그가 ‘족쇄’를 풀기 위해 한 세월을 탐험에 바쳐온 것인가.
“처음엔 등반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내가 8000m급을 몇 개 올라갔는지를 궁금해 했어요. 14좌는 꿈같은 일이었지만, 그걸 현실로 만들어가다 보니 비로소 스폰서가 생깁디다. 전 원래 남들 안하는 걸 해보고 싶어 하는 스타일입니다. 이제 그걸 해야죠.”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릴 적부터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네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백운대에 올랐고, 여느 소년들이 하나씩은 품는 엉뚱한 장래희망처럼 ‘탐험가’에 대한 동경이 유년을 지배했다.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소년 박영석에게 꿈으로 자리 잡았고, 1980년 어느 날, 시청 앞에서 마주친 동국대 마나슬루원정대의 귀국 카퍼레이드 행렬은 그것이 곧 삶의 모든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했다.
“제가 언제 공부를 했었어야지요.”
그는 “재수 끝에 동국대학교에 들어간 게 인생에서 그랜드슬램만큼 힘들었다”고 말했다. 순전히 동국대학교산악부에 들어가기 위해 동국대 체육교육학과를 지원했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가 염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모든 걸 바치게 된다. 특히 산쟁이들의 자질은 그렇다. 박영석의 산도 지금까지 그래왔다. 
동계 북알프스와 군 제대 후 아이거 북벽을 다녀오고 나서 첫 히말라야 등반은 1989년 봄 네팔 랑시사리1봉(6427m)이었다. 선배 오인환(현 한국히말라얀클럽 회장)씨를 대장으로 대원은 자신뿐, 셰르파 1명으로 된 단출한 원정대였다.
“돈이 없어서 올라가면서부터 장비를 팔기 시작했죠. 그렇게 1봉인줄 알고 올라갔는데 2봉이라서 다시 1봉을 올라갔습니다. 내려와서는 셰르파나 정부연락관 줄 돈이 없어서 오인환 선배가 먼저 귀국해 서울에서 비용을 마련해 보내와 저도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절할 정도로 궁벽했던 첫 히말라야 등반을 통해 오히려 최저 비용으로 등반을 갈 수 있는 방법들을 터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네팔에 혼자 있는 동안 랑탕리(7025m) 동계등반 허가를 받아둔 그는 귀국 후 곧바로 후배들과 함께 등반에 나섰다. 이 역시 빈 호주머니였기에 비용 절감을 위해 베이스캠프 도착 당일 1캠프를 설치하는 등 시작 6일 만에 동계초등을 이룬 등반이었다. 지병인 당뇨를 앓고 있는 그이지만 “체력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남서벽 등반 때 “2캠프에서 담배 한 대 태우니 안 보이던 루트도 보이더라”고 할 만큼 낙관적인 체질을 타고났다.  

“의리와 믿음은 산악인의 전 재산이다”
박영석은 지금까지 8000m급 원정만 33번을 갔다. 그중 첫 번째인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이후 지금까지 8번이나 그곳을 시도했는데, 그중 남동릉 무산소 등정, 북릉~남동릉 횡단등반, 남서벽 신루트 등정 등 각기 다른 루트로 3번 정상에 섰으며, 남릉, 북동릉, 동계등반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등반 자체만 놓고 보면 ‘노멀’함에 치우친 한국 산악계에서 신선한 시도였지만, 얼마간의 논란을 겪기도 했었다.
남동릉 무산소 등정은 같은 시즌 남서벽 등반 때 산소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국제산악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고, 횡단등반은 ‘단일팀 최초’라는 표현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남서벽 신루트는 ‘한국 최초 8000m급 신루트’라는 표현과 “서릉 변형루트가 아니냐”는 시선으로 말들이 있었다.
1997년 로체 등반 때 정상 40m 아래서 같이 갔던 셰르파가 네팔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정상이라고 말해 등정이 인정되긴 했지만, 이후 석연치 않았던 걸 털어내기 위해 2001년 자발적으로 재등반을 선언했던 그는 최근 일었던 이 같은 논란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줄곧 홀리 여사와 인터뷰에서 당시 무산소 등반에 대해 다시 설명을 했다. 남서벽 등반 때 마신 산소가 문제가 된다면, 가령 등반 중 카트만두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 무산소 등정을 한다면 산소냐 무산소냐라고 물었다. 홀리에게서 ‘내가 실수했다. 수정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고 밝힌 그는 인터뷰 모두 동영상으로 기록해 남겼다고 말했다.
당시 애초에 남서벽을 시도했던 동국대산악회 원정대는 악천후로 8500m 지점에서 후퇴를 결정한 후 루트를 바꿔 남동릉을 다시 시도했다. 김진성·안진섭·김태호 대원과 셰르파, 그리고 박영석이 등정을 시도했을 때 가지고 있던 산소 레귤레이터는 4개, 무산소를 시도한 그는 마스크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1993년 허영호씨의 예정에 없던 에베레스트 횡단등반 이후 박영석이 2006년 ‘단일팀 세계 최초’라는 표현을 쓰며 횡단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자 그는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산악인의 입장에서 보면 허영호씨의 등반 기록이 맞고, 개인적으로도 등반행위에 대해서 수긍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외적인 공식 기록은 이번 등반이 단일팀 최초 횡단등반”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 그는 “기록을 떠나 전부터 에베레스트에서 내가 해보고 싶던 등반이었다. 그를 위해 하산로인 네팔에만 1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런 것 다 필요 없이 그냥 넘어 오는 게 전부라면 누가 그렇게 큰돈을 들이겠나”라고 말했지만 “언론과 스폰서들은 어떻게든 홍보를 위해 ‘최초’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남서벽 신루트 등정에 대해서도 “코리안 루트가 베리에이션 루트라고 한다면 그전 보닝턴 루트나 러시안 루트도 남동릉이나 서릉과 만나는데 왜 신루트라고 하느냐, 오히려 당시 엄청난 대규모 원정대들에 비해 대원 5명과 고소포터 7명만으로 세계최고봉에 신루트를 뚫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 그만으로도 산악역사를 급진시켰다고 생각한다. 설령 외국에서 변형루트라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그건 한국 산악인들의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원정등반에 대한 초기 보도에서 ‘한국 최초 8000m급 신루트’라고 알려진데 대해서는 “2002년 시샤팡마 남벽 원정대가 변형루트 등정인 줄 알고 있었다. 그건 내 실수다. 이후 ‘한국 최초 8000m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여러 군데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박영석에게 남서벽은 각별하다. 첫 8000m급 원정이 그 벽이었고, 거기서 그는 100여m를 굴러 떨어지며 죽음을 마주해야 했었다. 당시 얼굴이 온통 상해 마취 없이 봉합수술을 받았던 그는 지금도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져 보인다고 말했다.
“추락 후 정신을 잃고 카트만두 병원으로 후송됐을 때 저는 줄곧 인수야영장의 어딘가에 누워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깨어났을 때 바로 눈앞에 보인 것이 병실에 걸려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사진이었습니다. 퇴원하면 곧바로 올라가서 또 등반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이후로도 4번을 더 남서벽을 등반했으며, 그 와중에 후배 4명을 에베레스트에 묻어야 했다.
“(오)희준이 (이)현조 사고 나고 더 이상 산에 안다니려고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애들한테 미안해지더군요. 남서벽에 신루트 내자고 약속했는데…. 이번에 정상에 닿는 순간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박영석은 지금까지 원정대를 꾸리며 후배를 대원으로 선발할 때 등반 실력보다 됨됨이를 보아왔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등반했던 후배들은 줄곧 그 곁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산악인이라고 하면 재산이 뭐 있습니까? 의리, 믿음 이런 거 아닙니까? 그걸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노스페이스와도 10년 넘게 같이 성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다른 업체에서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추파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내가 돈을 벌려고 했으면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집안을 버릴 순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97년부터 당시 골드윈코리아에 다니던 대학산악연맹 선배 정상욱(현 노스페이스 상무)씨의 제안으로 등반장비를 지원받아온 그는 현재 소속 브랜드의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산악계도 변화를 시도해야”
박영석은 가장 만나기 힘든 산악인 중 하나다. 그의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별로 없다. 사람들과 자주 만나면 구설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속 선배인 이인정 대산련 회장이 부를 때가 아니고선 여간한 행사장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대산련 이사직도 계속 고사했었고, 맡고 나서도 한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다. 
“전에 엄홍길 형과 같이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14좌 한다고 하니 주위와 언론에서 레이스 운운하며 꼭 싸움을 붙이는 것 같았어요. 그것 때문에 조금 소원해진 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언론의 행태와 여러 구설들, 외국산악계가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시선에 대해서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북극일 겁니다. 두 번째 북극점 탐험을 갔을 때, 성공했다고 하니 한국에서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한다고 전화기를 켜두라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식량도 다 떨어지고 다들 기진맥진해 있는데 ‘라면이나 한 박스 보내주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전화기를 꺼놓았는데, 그때 보도는 모두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했다고 나왔죠. 오보죠.”
“외국에서 한국대 등반 스타일을 지적하고 쓰레기 많이 버린다고 비난하는데, 실상 이제 그런 팀 찾아보기 힘듭니다. 홀리 여사의 경우 네팔에서 50년을 살았어도 네팔인들이 주는 물 한잔도 안마십니다. 인터뷰 할 때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면 되레 화를 내죠.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우리들을 좋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제 더 우리의 목소리를 낼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영석은 우리 산악계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 산악계도 바뀌어야 합니다. 저도 구태의연한 14좌를 했지만, 앞으로 새로운 방식, 새로운 길을 가야합니다. 당장 신루트가 안되면 변형루트라도 시도하고, 같은 루트라도 캠프 숫자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언젠가는 8000m급 알파인 스타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산악계만 부러워 할 필욘 없습니다. 한국인이라고 못하란 법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걷지도 못하는 데 뛰는 걸 요구할 순 없습니다. 기록은 언제든지 깨지는 것이고, 차근차근 새로운 시도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박영석은 올봄 안나푸르나 남벽으로 간다. 코리안 루트를 오르고 나면, 가을엔 태양열만을 이용하는 무일산화탄소 탐험대를 꾸려 남극횡단에 나설 예정이다. 이후로도 14좌에 코리안루트를 내는 일은 자신을 떠나 후배들에게 이어질 때까지 계속할 계획이다.
“14좌나 그랜드슬램하고 나서 이제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산악인이 산에 가야 산악인이죠. 편하게 살려고 생각하면 그게 산악인입니까?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호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는 되레 내게 물었다.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히말라야의 호랑이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

8000m급 14좌와 7대륙최고봉, 남북극점 등 ‘산악그랜드슬램’을 인류 최초로 마친 박영석.
하지만 그는 “그랜드슬램을 마치는 순간 발목에 족쇄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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