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호의 CAMP하강기
  • 등록일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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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자 하강기요? 저런걸 보물이라고 할 수 있나? 인터뷰? 그런건 그냥 대충 알아서 쓰면 안돼요?”
방정호(한국산악회·39)씨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을 때 들은 첫마디이다.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그에게는 짧은 인터뷰조차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처투성이 하강기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칠이 벗겨져 원색을 잃은 은빛 하강기는 ‘토왕폭의 은빛날개’라는 별명을 지닌 주인을 닮아있다. 마침내 알아낸 빛바랜 하강기의 상처는 초등정의 기억을 몸에 새긴 것이었다.


때는 2000년 7월, 오랜 준비기간이나 훈련도 없이 단지 “자, 떠나자!”란 말 한마디로 뭉친 남자들이 있었다. 전 해에 찍어왔던 사진 한 장만으로 의기투합해버린 그들의 목적지는 파키스탄 히말라야 K6 산군에 속해있는 그레이트 타워(5593m). 이곳은 베이스캠프가 3800m 정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1800m를 꼬박 올라야 하는 거벽이다.
끓어오르는 의지 하나로 뭉친 등반대는 7박 9일간의 등반 끝에 거벽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에 몇 되지 않는 세계 초등정 업적을 기록한 6명의 등반대원 중에 대부분 선등을 도맡았던 사람이 방정호씨다. 그러나 국내산악인뿐만 아니라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등반 성공은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어차피 승리 메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히려 “초등정이라기보다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느냐가 더 중요한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즐거웠던 등반에 만족했을 뿐이다.

그 즐거움을 함께했던 하강기는 이제 재기불능이 되어 쓸쓸히 남겨져있다. 하지만 방정호씨는 옛 친구를 언제까지나 혼자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힘차게 거벽에 오르고 난 뒤, 즐거운 기억을 새긴 하강기를 데려올 날이 있겠지. 그를 닮아 말없이 겸손한 새 은빛날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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