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병기인가 필요악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등록일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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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병기인가 필요악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준 암벽등반의 친구

 
암벽등반의 역사에 있어 피톤, 카라비너, 듈퍼식 하강은 ‘현대 암 벽등반의 3대 발명품’이라 하여 꼭 세트로 붙어 다닌다. 그도 그 럴 것이 이 셋은 거의 같은 시기인 1910년 무렵, 자일파트너였던 한스 피히틀(Hans Fiechtl·1883~1925), 오토 헤어초크(Otto Herzog·1888~1964), 한스 듈퍼(Hans Dulfer·1893~1915)에 의해 각각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면서 유럽 등산계에 는 ‘등산이 한계에 이른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만연했고, 그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 출현한 이 셋과 크램폰 덕분에 등산의 한계는 무 한히 넓어지게 되었다.

인위적인 구걸 혹은 진일보한 혁명
사실 피톤은 한스 피히틀이 고안하기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원시 적인 형태의 피톤은 L자 모양의 철제 고리로 단지 턱에 로프를 걸 쳐놓기만 하는 용도로 쓰였으며, 이후에는 고리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보조끈으로 고리 매듭을 만들어 로프를 통과시키면서 등반 했다. 이후 카라비너의 발명과 함께 이를 고정할 수 있는 고리 혹 은 구멍이 있는 피톤(piton)이 탄생하는데, 발명자의 이름을 붙 여 ‘피히틀 피톤’이라고도 불렸다. 영어권에서는 핀(pin) 혹은 펙 (peg)으로, 독일어로는 하켄(haken)이라고도 불린다. 이전에 L 자 모양의 고리를 사용할 때는 안전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선 등자는 죽지 않으려면 절대 추락하지 않아야 했는데, 카라비너 덕 분에 피톤은 든든한 중간확보점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둘의 조합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동부 알프스 북부 지방과 돌로미 테, 서부 알프스 쪽에서 인공등반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았던 카라비너와는 달리 피톤에 대해 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다. 특히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여 기는 영국의 보수적인 산악인들은 피톤의 사용을 극도로 기피했 는데, 알파인클럽(The Alpine Club)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윌슨은 “피톤은 명예스럽지 못한 용구”라고 매도했으며, 일부 자유등반 신봉자들은 “피톤을 사용하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 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인식이 비슷해, 자유 등반의 대표기수였던 오스트리아 등반가 파울 프로이스(Paul Preuss)은 “피톤 사용은 인위적인 구걸”이라고 말했고, 6급 등반 시대의 대표적인 등반가이자 인공등반기술을 창안한 이탈리아 등반가 에밀리오 코미치(Emilio Comici)도 “가능하면 첫 피치에 1개 정도의 피톤만 사용하자”며 인공 보조용구 과용을 억제할 것 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톤은 곧 상용화되었 고, 이로 인해 알프스의 등반 수준이 급진전하게 되어 돌로미테 등의 수직 거벽에서 초등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요세미티 개척과 함께 화려하게 변신하다
초기의 피톤은 연철로 주조했으며 바위 틈새 모양에 따라 알맞게 변형되어 들어가 박히도록 만들 어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몇 번 사용하 고 나면 구부러지거나 부러져 버렸기 때 문에 더욱 강한 소재가 절실했고,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등반가 피에 르 알렝(Pierre Allain)은 알루미늄 합 금으로 된 등반장비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후 피톤은 엉뚱하게도 미국 요세미티에 서 화려한 변신을 한다. 1930년대 시에라 클럽이 커시드럴 록을 시도한 뒤 요세미티 는 암벽등반의 메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의 석회암에서 흔히 사용하던 당시의 피톤은 요세미티의 단단한 화강암 앞에 무력했다. 때문에 스위스에서 미국으 로 이민을 간 존 살라테(John Salathe)는 1947년에 안톤 넬슨(Anton Nelson)과 함께 자신이 개발한 경철 합금의 강한 피톤을 사용해 ‘로스트 애로우(Lost Arrow)’ 침니를 5일 만에 등정함으로써 요세미티 등반의 막을 연다. 당시 그가 만 든 피톤은 포드 자동차 T4형의 스프링을 사용해 강도가 높았다. 1950년에는 앨런 스텍(Allen Steck)과 함께 센티럴록 북벽을 올 랐는데, 마지막 구간에 150개의 피톤과 함께 9개의 익스펜션 볼트 를 사용함으로써 요세미티 최초의 빅월 등반을 기록하게 된다.

‘요세미티의 전설’이라 불리는 살라테로부터 장비 제작의 비법 을 전수한 이는 국내 산악계와도 인연이 깊은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다. 그는 살라테의 기술력에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 이디어를 합쳐 나이프 블레이드, 부가부, 러프, 봉, 스카이훅 등 여 러 모델의 피톤을 제작해냈다. 이러한 장비들의 개발로 1950년 대 중후반부터 요세미티의 여러 거벽에 새로운 길이 하나둘씩 개 척되며 세계 산악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덩달아 취나드의 강철 피톤은 유럽에까지 인기리에 보급되었다. 취나드가 만든 여러 장비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1959년 엔지니어 출신의 클라이머 톰 프로스트(Tom Frost)와 합세해 만든 우표 크기의 러프(RURPRealized Ultimate Reality Piton)다. 러프는 머리카락 굵기의 미 세한 바위 틈새에도 박을 수 있어, 그 이름처럼 매우 난이도가 높 은 인공등반도 보통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때문에 취나드는 러프 를 두고 ‘피톤의 지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클린 클라이밍 확산과 함께 너트 및 SLCD 출현
이처럼 피톤은 현대 암벽등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바위의 파손을 가중시키는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매도된다. 특히 초기 요세미티 거벽에서 수많은 신화를 남긴 워렌 하딩(Warren Harding)의 경우 볼트를 과용해 ‘무법 자’로 불리기도 했다. 때문에 로열 로빈스(Royal Robbins)를 주 축으로 한 미국 내 전위적인 클라이머들과 심한 불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클린 클라이밍’ 혹은 ‘해머리스(hammerless) 클라이밍 운동이 제기되며 바위의 파손이 비교적 덜한 너트류 사용이 확산되었다. 너트는 1940~50년대에 영국 클 라이머들이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작은 돌멩이 에 슬링을 걸어 촉스톤처럼 사용했다. 1960년대 클린 클라이밍 확 산과 함께 금속으로 만든 너트가 등장했으며, 1973년 취나드는 너 트만을 사용해 앨 캐피탄 노즈의 전 구간을 오르는 ‘올 너트 클라 이밍’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스프링의 힘으로 작동되는 캠 기구 SLCD(Spring Loaded Camming Device)가 등장하게 된다. 레 이 자딘(Ray Jardin)이 개발한 프렌드는 암벽등반의 역사에서 나일론 로프 이후 가장 큰 혁명으로 평가된다. 하나 또는 두 개의 축으로 회전하는 4개의 캠이 당김판에 와이어로 연결된 프렌드는 너트류 설치가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크랙에서 한손으로 쉽고 신 속하게 설치할 수 있어 자유등반의 지평을 급속히 넓혀주었다. 하 지만 프렌드 역시 처음에는 등반의 불확실성을 제거했다는 윤리 논쟁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프렌드 이후 현재까지 TCU, FCU, 에일리언, 캐멀롯, 팻캠, 오 프셋 프렌드 등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의 SLCD가 개발되었다. SLCD는 너트에 비해 훨씬 설치하기 쉬우나 몇 가지 주의가 필요 하다. 손잡이를 너무 당겨 크랙에 꽉 끼게 설치하면 회수가 어렵고, 너무 벌어지게 설치하면 지지력이 약해져서 추락 시 쉽게 빠질 수 있으므로 ‘적당히’ 잘 설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각각 의 캠이 비슷한 크기로 벌어져 최대한 바위에 고르게 접촉되어야 안전하다. 오래 사용하면 스프링 속에 이물 질이 끼어 작동이 힘들거나 크랙에서 지지 하는 힘이 약해지므로 틈틈이 관리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국내 사용은 50년대부터로 추정, 70년대부터 외국과 궤를 같이 해
우리나라에서 하켄(국내에서는 주로 하켄 이라 불렀다)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에 대 한 정확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1920~30 년대 서울 근교의 여러 암벽이 초등되며 근 대 등산의 개화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당 시 이를 주도했던 재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의 사진에서는 로프만 보일 뿐 해머나 하켄류를 찾아보기는 힘 들며, 이후 일본을 통해 서양의 근대 암빙벽 장비들이 국내에 유 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60년대 인수봉과 선인봉에서 활약 했던 산악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코스개척을 위해 바위를 오르 다보면 간혹 녹슨 하켄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담 배꽁초나 하켄이 없으면 루트초등으로 간주하기도 했다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하켄이 확산된 것은 1960년대 초 이본 취나드 가 한국의 미8군에서 복무를 할 당시, 63년 9월 인수봉에 취나드 A,B 코스를 개척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켄이 무척 귀 해,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었다. 때문 에 일부 클라이머들은 대장간으로 달려가 주문제작을 하거나 목 공소에서 물푸레나무 등을 깎아 우드펙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 다. 당시 국내 등반계의 대표주자였던 유기수씨(에코클럽)는 67 년에 외제 볼트를 흉내 내어 만든 볼트를 사용해 인수봉 남측에 에 코길을 개척했고, 이후 자동차 스프링을 대장간으로 가져가 취나 드 하켄과 러프를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즈음부터 일부 산악인들이 서양이나 일본의 산악관련 서적을 보 고 장비를 직수입하거나 제작하면서 암벽등반 확보물의 발전도 궤 를 거의 같이 한다. 당시 수입 장비는 귀하고 비싼 탓에 해머로 ‘때 려 박는’ 하켄류는 모래내 금강, 설악산장 등 국내 업체의 제품이 많이 사용되었고, SLCD류는 일본 동경제강이나 유럽, 미국제를 선호했다. 특히 유기수씨는 70년대 중반부터 종로에서 장비점을 운영하며 국내에 선진 등반장비를 보급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확보물의 발달로 등반의 가능성과 한계는 무한히 확장되었다. 또한 그것은 모순적이 게도 대자연에서의 불확실성과 자연 사랑 을 추구하는 산악인의 철학에 위배되어 많 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 도 이들이 저 수직의 거벽을 끊임없이 오 르고자 욕망하는 클라이머들의 든든한 ‘친 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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