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여성 히말라야 등정자 기형희씨
  • 등록일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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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여성 히말라야 등정자 기형희씨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흔히 자그마한 체구에 날랜 걸음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두고 ‘날 다람쥐’라는 별명을 갖다 붙인다. 국내 여성 산악인 중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형희(57)씨 또한 예외 없이 그 말을 달고 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체격이며 행동하는 것, 심지어 외 모까지 날다람쥐를 빼닮았기 때문. 하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을 가 만 들여다보면 한 마리 표범이 떠오른다. 가수 조용필의 노래 ‘킬리 만자로의 표범’ 속에 등장하는, 산기슭을 어슬렁거리기보다 얼어 죽을지언정 기어코 눈 덮인 산정에 오르고야 마는,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모든 운명을 걸었지 만 그래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고고한 표범이. 강인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그 짐승을 이 가녀린 여성에게 비유했다고 해서 너무 깊이 따지지는 마시라. 그냥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또한, 노 래에 등장하는 표범도 콕 찍어 ‘수컷’이라는 말은 없으니까.

묻지 마라,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를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체질’이라는 말을 쭉 들었고, 중학교 때는 체력검사에서 심폐력 이 좋게 나와 선생님이 마라톤 선수를 하라고 권했을 정도였어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발 자취를 남긴 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끼’를 보이는 경우가 많 다. 기형희씨 또한 일찌감치 발군의 운동신경을 뽐냈고, 한번 시작 을 했으면 끝을 보고야 성미 덕분에 전문 산악활동 뿐 아니라 스쿠 버다이빙과 산악스키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 산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한국산악회에서 주최했 던 오리엔티어링 대회에 오인환(현 히말라얀클럽 회장)씨가 참가 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반강제적으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얼떨결에 대회에 나갔지만 분위기를 몰라 멀뚱멀뚱 있던 그에게 박승기(현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씨가 다가와 친절하게 이것저것 을 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의식주를 모두 한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등산이라는 행위에 대해,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 대한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신문에서 본 ‘한국등산학교 10기 교육생 모집’ 이라는 단 두 줄의 기사에 끌려 등산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난생 처음 해보는 클라이밍이었지만 누구보다 움직임이 좋았고, 수료 생 가운데 유일한 여성임에도 특별한 대우 없이 남자 동기들과 똑 같이 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선생님들이 절 많이 아끼셨고, 등산학교 졸업 이후 권효섭, 안광옥 선생 등의 권유로 제가 다니던 직장인 ㈜선경(현 SK그룹) 내에 선경여자산악회를 만들게 되었어요.”

당시 산악회는 규율이 매우 엄격했는데, 회원이라면 누구를 막론 하고 한국등산학교를 수료하고 전문등반을 해야 하는 게 철칙이 었다. 그 덕분인지 모든 회원의 기량이 빨리 향상됐고, 자연스레 분위기가 히말라야 원정으로 이어졌다. 1981년 기씨는 산악회 장을 맡고 있던 정길순씨와 함께 네팔 안나푸르나 산군 끝자락에 위치한 람중히말(6986m)로 정찰등반을 나섰다. 회사에서 휴가 를 내주지 않아 사표를 내고 받은 퇴직금을 노잣돈 삼아 떠난 길 이었다.

정찰등반은 성공적이었으며, 그들의 파격적인 행보는 세간에서도 큰 관심을 받아 당시 인기 TV프로그램에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회사는 또 한 번 발칵 뒤집혀 그룹 회장님의 호 출로 이어졌고, 복직은 물론 원정에 대한 후원도 받을 수 있게 되 었다.

1982년 정길순 대장을 필두로 기형희, 윤현옥, 이원행, 소유미 등 5명의 선경여자산악회 원정대는 람중히말 등반을 위해 장도에 올 랐다. 예상치 못한 크레바스와 강풍, 셰르파와의 갈등 등 갖은 어 려움을 극복하고 5월 6일에 기형희 부대장이 1차 등정에 성공하 고, 2차로 윤현옥 대원이 정상에 섰다. 기씨는 6800m 지점에서 비 박을 감행하기도 하고, 칼날 리지 돌파에 이어 마지막의 수직 빙벽 까지 올려치느라 힘들었지만 ‘내가 시작했으니 매듭도 내 손으로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5 월 5일 어린이날 선물로 국내에 등정소식을 전하려 했으나 하루가 늦어져, 막상 정상에 올랐을 땐 그리 기쁘지 않았다고. 당시 날씨 가 나빠 정상 ‘인증 샷’이 깨끗하지 않은데, 반대편 다른 루트로 등 정한 일본팀과 우연히 만나 세계최초로 서로 다른 루트로 올라 정 상에서 조우한 기록을 남기며 등정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히 말라야 등반사에서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의 승전보를 울리는 순간이었다. 여권을 만드는 것조차 어려웠던 그 시절, 히말라야에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이 룬 값진 성과를 인정받은 그녀는 그해에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특별하다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좋아서 최선을 다했고, 의무를 잘 마쳤다는 생각이에 요. 그 원정이 가치 있는 건 성공을 했다는 사실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여성들만의 힘으로 원정대를 꾸려 한국을 떠났다는 점이라 고 생각해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산은 중독성이 강하다. 특히 높은 산을 한번 경험한 이라면 그 치명 적인 매력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기씨 또한 마찬가지로, 원정 이후 더 넓은 세상의 다양한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복직 한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그리곤 곧바로 허욱, 허정식, 임병 길씨와 함께 미국 요세미티로 등반을 떠났다. 1984년에는 스위스 마터호른을 등반했으며, 1986년부터 88년까지 매년 일본 북알프 스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 모두가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특유의 강단과 의지로 세 상의 터부에 맞섰다.

기형희씨의 활약은 산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 산을 통해 알고 배우게 된 산악스키와 스쿠버다이빙에까지 이어졌다. 시쳇말로 ‘하나에 필이 꽂히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인지라, 대충 발만 담 갔다 뺀다는 건 스스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1979년 한 국잠수협회 교육을 통해 정식으로 스쿠버다이빙 강사자격증을 취 득한 그녀는 이듬해에 국내 민간인 최초로 독도 및 마라도 수중탐 사를 했다. 1981년에는 미국에서 PADI 칼리지 교장을 초빙해 한 국여성 최초로 스킨스쿠버 다이빙 강사자격증을 취득하고, 수년 간에 걸쳐 잠수 교육을 맡아 진행하며 세계 전역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산악스키 또한 마찬가지. 회사 동호회를 통해 스키를 알게 된 후 제 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1980년대 초반 당 시에는 국내에서 산악스키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를 보기가 어려웠 다. 그러던 중 사회체육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87년에 묘코프로스키스쿨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내 나이가 30살이 넘었는데,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는데 거기선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해서 손에 주부습진이 생길 정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은 한국인 최초로 일 본직업스키교사협회 강사가 되었지요.“

소설 한 권으로도 모자란 숱한 역경이 있었지만, 그때의 경험은 지 금까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자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에 거주하던 시절에는 많은 국내산악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 할을 하기도 했고, 1990년에는 용평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의 스키 강사들을 초빙해 ‘잼세션 스키강습회’를 개최, 1997년부터 99년 까지는 3년 연속으로 백두산 동계 스키등반을 해내기도 했다. 그 사이 산악활동도 꾸준히 해 아프리카 케냐산 바티안봉 한국인 최 초 등정,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등정, 에콰도르의 침보라조와 코토 팍시를 등반했다. 또한 2003년에는 평창에서 열린 제1회 산악스 키대회에서 치아 치료 도중이라 정상 컨디션이 아님에도 불구하 고 악바리 근성을 발휘해 여성부 3위를 차지했다.

오랜 시간을 통해 몸에 익힌 경험들은 말로 다하지 않아도 그가 어 떤 사람인지를 드러내 준다. 비록 머물지 않는 바람같이 살아온 삶 이지만, 불꽃처럼 타올랐던 흔적들은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 라 여전히 그녀의 삶을 비추는 불빛이 되어 있었다.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국내 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자로 큰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이 후 가족이 있는 미국과 국내를 수시로 드나들고 본인 또한 외국에 서 학교를 다니는 등 주로 외국생활을 하며 외국의 산들을 오른 탓 에, 기씨는 국내에 딱히 적을 둔 산악단체도 없고 산악계 선후배와 도 많은 단절이 있었다. 하지만 람중히말 등정 20주년이 되던 2002 년에 여성 산악인들 간에 교류의 구심점이 있어야겠다는 움직임에 한국여성산악회가 창립했고, 기형희씨가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

여성산악회는 창립 첫해에 7대륙 최고봉 중 하나인 엘부르즈 (5642m) 원정에 나서 전원등정을 해냈고, 그해 세계여성 최고령 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일본의 여성 산악인 와타나베 다마에 씨를 초청해 강연회를 여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대외 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기씨는 후배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자신 의 인맥을 동원해 산악계 선배들에게 소개도 하고, 기업인들과 연 결해 후원의 고리를 만드는 등의 노력도 기울였다. 특히 가장 아꼈 던 후배인 고 고미영씨에게는 그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 건을 마련해주고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미국에 계시 던 어머님이 위독한 탓에 곁을 지키느라 회장직을 오래 지키지는 못했지만, 기씨는 “여성산악회의 초반 기틀을 마련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람중히말 원정과 함께 살아오면서 잘한 일 두 가지 중 하나로 꼽는다.

2007년 오랜 병석에 계시던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로 기형희씨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결혼을 안 한 까닭에 슬픔을 함께 나눌 이 가 없어 상실감은 더욱 컸고, 언덕조차 없는 시카고에서 산과 바다 와 스키장이 있는 시애틀로 주거지를 옮겨 미국 스키학교에서 일 하며 미국스키강사에 도전을 한다.

하지만 그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준 건 역시 산이었다. 이 때를 즈음해 로체샤르(엄홍길)에 참여했다가 급히 장비를 빌려 일 본팀과 아일랜드 피크를 등정하는가 하면 스팬틱(고 김형일), 낭 가파르바트(고 고미영) 등 여러 후배들의 해외원정에 함께 참가해 베이스캠프 매니저 역할을 했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산악 등반가이드로 일하며 트래킹 인솔 업무를 맡아 세계 각지의 산을 누비고 다녔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요. 누구에게 뭔가가 필요할 것 같다 싶으면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주는 성격이기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 들 등 남 뒷바라지하는 데 기쁨과 보람을 느끼죠.”

현재는 무릎부상 등으로 잠시 쉬고 있지만, 기형희씨는 내년에 ‘오 지랖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또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 설 예정이다. 카약·산악스키·산악자전거·도보 등의 수단으로 히말라야를 횡단하는 산악인 박정헌씨의 ‘히말라야 씨투써미트 프로젝트’에 팀매니저로 동행하는 것. 후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나선 길에 오히려 민폐가 될까봐 걱정이라는 말과는 달리, 새로운 도전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대로 그녀의 얼굴에는 소녀 같은 생 기가 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중에는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라 는 구절이 있다. 언제나 매 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왔기에, 고독이 란 건 떨쳐낼 수 없는 그녀의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모든 것을 잃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기에, 진정으로 삶을 사랑 했노라 말할 수 있으리라. 오늘도 배낭을 메고 구름인가 눈인가 알 수 없는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그의 정열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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