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계에 ‘긍정 백신’ 전파하는 조대행 박사
  • 등록일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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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2007
산악계에 ‘긍정 백신’ 전파하는 조대행 박사
그 산처럼 넉넉한 미소는 어떻게 완성되어 왔는가

 
산을 오르는 행위는 크고 작은 위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일이나 같다. 높고 낮음을 떠나 산이 지닌 환경의 특수성은 늘 인간을 매료시켜왔고, 저마다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산을 찾 은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말없이 내주곤 했다. 그리고 때로 는 감춰두었던 야성을 드러내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시련 을 안기기도 했다. 그런 모진 시련을 겪었던 이들 가운데는 더 이 상 미련이 없다며 산을 등진 경우도 많지만, 변함없는 애정으로 계 속 산을 찾거나 이전보다 더 열렬히 산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조대행(용악회·67세)씨도 후자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 그는 반 백년 가까이 자신에게 곁을 내준 산이 그저 감사하다고 말한다.

 
눈앞의 5년보다 앞으로의 50년을 택했다
조대행씨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집안의 내력 때문이다. 조씨의 아버지는 1950년대에 한국산악회 이사를 역임한 바 있고, 친형인 조선행씨는 경복고교 산악부를 창설한 초 대 멤버로 울릉도 송곳봉을 초등하기도 했다. 사촌형인 조경행씨 역시 양정고 산악반장을 지냈으니, 그가 산을 다니지 않았다면 그 게 오히려 비정상일 정도다.

조씨는 용산고 입학과 동시에 산악부에 들어 활발한 활동을 했고 가톨릭의대에 진학한 후에도 산악부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 만 무서운 선배들 밑에서 ‘빳다’를 맞아가며 제대로 등산을 배웠 던 고등학교 산악부의 분위기와는 달리 ‘날라리 산악회’나 다름없 는 대학산악부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부가 너무 힘든 의 과대학의 한계 때문인지 목숨 걸고 동아리 활동을 하려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대학산악부보다 용산고OB들 (용악회)과 주로 활동을 했다.

1967년 2월, 그는 용산고 선후배 사이인 전용규, 이근배씨와 설악 산 동계 등반에 나섰다가 조난을 당하게 된다. 사상 최대의 폭설을 기록한 악천후 속에서 봉정암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은 것. 당시 구 신회, 고 최수남씨 등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구조를 받은 뒤, 그들 의 소속단체인 고령산악회, 설령산악회와 하켄클럽 등으로부터 입회 권유를 받게 된다. 젊은 혈기에 당장에라도 산악회에 가입해 좀 더 깊이 산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버지의 만류에 뜻을 접어야 했다.

“당시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곤 ‘너 앞으로 5년만 산에 다니고 말 래, 아니면 50년 동안 다닐래?’하고 물어 보시는데, 그 말에 정신 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후로는 산악부에 발만 담근 채 학과 공부에 열중했죠.”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엔 그의 산악부 후배들이 설악산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듬해인 1968년 10월 24일, 연휴를 맞아 가톨릭의대 산악부원 9명은 설악산 십이선 녀탕 계곡을 올라갔다. 때는 가을이었지만 기상이변으로 그날따 라 설악산에 엄청난 폭우가 퍼부었다. 피할 새도 없이 갑자기 내 린 비에 옷이며 장비가 모두 흠뻑 젖어버린 대원들은 근처의 동굴 로 피신했지만, 밤이 되자 기온은 더 떨어지고 계곡에는 살얼음이 끼어 실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위급한 마음에 구조를 요청 한다며 대장과 부대장이 시간차를 두고 하산을 했고, 대장이 없는 상태에서 나머지 대원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되어 우왕좌왕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날 구조대가 올라갔을 땐 계곡에서 7 명이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남자 1명과 여자 1명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그 애들은 산악부 2년 후배들로 앞날이 창창한 예비 의사들이었 어요. 사고 나기 전해에 나와 함께 12선녀탕의 중간쯤 되는 복숭아 탕까지 오른 적이 있었고, 그때도 원래 내가 함께 갈 예정이었는데 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갔어요.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대형 참사는 안 벌어졌을 텐데….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이 사고 이후 그는 죽은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산에 다 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바쁜 공부와 시험 틈틈이 짬이 날 때 마다 산을 찾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레지던트와 인턴 시절에 도 기회만 있으면 산으로 달려갔다. 한번은 당직 서느라 밤을 새 고 선인봉 표범길에 갔다가 30m 가량 추락한 적도 있다. 아직까지 손에 흉터가 크게 남은 것으로 보아 결코 가벼운 사고는 아닌 듯한 데, 정작 그는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숱한 사고와 조난을 학술적으로 승화시켜 국내외의 산악사고 사례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부터는 코오롱등 산학교 강사로 참여해 ‘산의 위험과 조난사’ ‘등산의학’ 등의 과목 을 강의해오고 있다.

 
77년·88년 대산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팀 닥터로 참가
아버지와 했던 약속과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지키기 위해 산을 향 한 욕구를 몇 번이나 꾹꾹 눌러 참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가 그것으로, 그는 1971년 대한산악연맹의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훈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1976년에도 77에베레스트 원정을 위 한 2차 훈련대에 참가했는데, 당시 대산련에서는 그를 위해 병원 으로 공문을 발송해주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병원장에게 딱 걸리 고 말았다. “의사를 계속할 생각이냐?”는 병원장의 말에 “그렇다” 고 대답을 했더니, 병원장은 “이건 못 본 걸로 하겠다”며 그의 눈앞 에서 공문을 찢어버렸다. 그는 이 때 마음속으로 ‘이제 히말라야는 물 건너갔구나’하고 단념했다고 한다.

인턴과 레지던트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1976년 전문의 시험을 보 러 가는 날, 대문을 나선 그의 눈앞에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거기 엔 77에베레스트원정대 훈련대의 설악 좌골 조난 소식이 실려 있 었다. 전문의 시험에는 합격했어도 조씨의 마음은 무겁기만 해, 이 젠 진짜 히말라야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근처의 바위나 찾아다니며 소령으로 진급했을 때, 끝난 줄 알았던 77팀과 다시 연결고리가 생겼다. 고 최수남 등반대장의 후 임으로 그의 용산고산악부 3년 선배인 장문삼씨가 결정되며 그에 게 다시 원정 갈 의향이 있느냐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이번에 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지만, 국방부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영도 대장이 청 와대에 요청을 해, 국위선양의 명분을 앞세워 국방부에서 파견하 는 형식으로 원정대에 팀 닥터로 합류할 수 있었다.

“당시 에베레스트 원정은 범국가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에, 내가 만 약 사고로 죽었으면 현충원에 안장되었을 거에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에베레스트였고 그렇게 힘들게 떠난 원정이 었지만, 그는 해발고도 7800m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컨디션으로는 옐로밴드를 넘어 C4가 있는 사우스콜까지 가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그만 내려오라”는 대장의 무전에 군말 않고 돌 아섰다. 공격조가 아닌 그가 텐트와 식량 그리고 산소를 쓰게 되면 원정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련이 남을 법도 하건만, 그는 “나는 의사이기 이전에 산쟁이기 때문에 다만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올라보고 싶었다”며 “그런 마음을 헤아 려준 대장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히말라야를 한 번 다녀오고 나니 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1984년 한국산악회의 마칼루 원 정에도 참가하려 했으나 떠나기 한달 전에 무산되었고, 1986년 대 산련 K2 원정도 동료의사인 정덕환(경희대 정형외과 교수)씨에 게 양보하면서 번번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항상 바쁜 의사가 병 원에서 휴가를 얻어내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늘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다녔어요. 병원장이 워낙 완 강해서 여차하면 사표를 내고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이 하늘에 통했던지, 1988년에 팀 닥터로 다시 한 번 대산련의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에 참가할 기회가 그에게 왔다. 다행히 병원에서 휴가를 내줘 사표를 쓰는 최악의 상황도 면 할 수 있었다. 당시 원정에서는 장봉완 부대장이 고소에서 위경련 을 일으킨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조씨가 즉시 베이스캠프로 하산시켜 치료를 해줌으로써 팀 닥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했다. 장씨는 치료 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고배 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역시 후회는 없는 등반이었다.

 
알피니스트 이전에 휴머니스트이고 싶다
두 차례의 원정 이후, 그는 히말라야에 미련을 버리고 일과 가정, 그리고 국내 산행에만 집중했다. 이는 사실 ‘작전상 후퇴’로, 나중 의 큰 등반을 위한 와신상담의 과정이었다. 대신 1991년 미국 의학 연수중에 용산고 후배인 주영씨 등과 요세미티와 조슈아트리 암장 을 돌며 바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장장 16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는 2004년 가을 용산고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용악회 후배들과 쿰부 히말라야의 미봉 아마다 블람(6856m) 등반에 나섰다. 당시 조씨는 컨디션이 무척 좋았기 에 주위에서는 그의 등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C2에 서 돌연 “컨디션이 나쁘다”며 하산을 해버렸다. 나중에 밝힌 것이 었지만, 등정을 하고 내려온 1차 대원들과 2차 등정을 위해 올라온 대원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C2가 너무 좁아,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등반할 수 있도록 스스로 내려온 것이었다.

“산이야 다음을 기약하면 되고,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멤버가 한명 더 오른다면 그게 성공이죠 뭐. 당시 대원 8명 중 4명이 정상에 올 라서 아주 기뻤어요.”

평소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그의 넉넉한 성격은 이미 주위 산악인들에게 정평이 나 있으며, 이 일은 극한의 상황에 서도 빛이 바래지 않는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산 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음양으로 후배들을 도와온 그의 행보는 최근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0년 젊은 산악인들이 한국산악 계의 미래를 묻기 위해 결성한 ‘오버마운틴’ 프로젝트에 금전적인 도움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함께해 후배들의 귀감이 되 기도 했다.

아마다블람 등반 이후 그의 등반활동은 예전에 비해 더욱 왕성해 졌다. 2008년에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진들과 함께 알프스 몽블랑 과 마터호른을 등반한 데 이어, 2010년에는 돌로미테 등반에 나서 기도 했다. 또한 2007년부터는 서석환(고령산악회) 이완석(에코 클럽) 유동진(한등회)씨 등과 함께 ‘실버팀’을 만들어 우이동 코 오롱등산학교 인공빙벽장에서 훈련을 했다. 그 결과 조씨 2008년 에는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토왕폭을 처음으로 완등하는 데 성공 하고, 2011년까지 4년 연속 토왕폭을 오르며 노익장을 과시하기 도 했다.

“우리 실버팀의 올해 평균연령이 68세에요. 평균연령 70세가 넘 으면 다시 토왕폭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이번 시즌부터 다시 우이 동에 모여 운동을 시작하며 준비할 생각이에요.”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 불리는 저명한 물리학자 아 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은 인생에 대해 “L(Life)=G(God)+J(Job)+E(Enjoy)”라는 공식을 정의내린 바 있다. 비록 에베레스트의 정상은 밟지 못했으나 조대행씨는 자 신의 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산으로 인생을 즐겼으며, 항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절대자에게 감사하며 살아왔다. 그의 평온한 얼굴은 평생의 인내와 노력으로 얻은 선물 인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맞잡은 그의 따뜻한 손끝에서 무한긍 정의 에너지가 전해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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