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대 칼럼 - 만년설에 묻혔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나다
  • 등록일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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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에 묻혔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나다

 
이 영화는 1997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거벽 가셔브룸 4봉 (Gasherbrum IV·7925m)에서 펼쳐진 한국대의 도전기록이다. 현지에서 등반 대원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 대본도 연출 도 없는 100%의 실제상황인 것이다. 이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연 출가가 리메이크한 작품이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이다. 16년 전 만년설에 묻혀 잊혔던 사건의 나락들을 하나 둘씩 주워 모아 꾸민 이야기다.

현 시점에서 이 영상을 보면 흐릿한 화질이 조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16mm 구식 촬영장비로 대원들이 고소에서 직접 찍은 영 상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월이 그만큼 변했음을 실감할 뿐이다. 흥행에 성공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사실에 허구를 덧씌워 포장한 ‘팩션(팩트+픽션)’이 많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런 흥행 위주의 허구가 없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의 대역도 없고 출연자들 모두 연기와는 거리가 먼 산악인들뿐이다. 그러나 사실 재현에 초점을 맞춘 다큐영화로는 손색이 없다.

등산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라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산악영화가 그렇듯이 무언가 손에 땀을 쥐 게 하는 극적인 장면도 없기 때문이다.

촌각을 다투는 극적인 위기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일이나, 굉음 을 내며 눈사태가 텐트를 덮치거나, 크레바스에 빠져 생사를 다투는 일이 한 장면도 없다. 그래서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이런 기 대를 가진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 영화를 관람하지 않는 것이 좋 다. 이 영화가 의도하는 바는 산악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의 지를 그린 사실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퍼즐 을 짜 맞추듯이 과거와 현재, 비운의 캐릭터가 된 슬로베니아 등 반가 슬라브코의 주변 인물을 찾아 해외를 오가며 작품을 구성하 는 노고까지 더했다.

‘빛나는 벽’으로 향했던 젊은 우리 산악인들
‘빛나는 벽’이라는 뜻을 가진 가셔브룸 4봉의 자태는 우아한 피 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일몰 때 오렌지 빛깔의 저녁노을이 비 추면 서벽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인다. 1892년 영국의 콘웨이 (W.M. Conway)일행에 의해 이 산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이래 오 랫동안 등반가들에게 미지의 봉우리로 남아있었다.

이 산의 정상에 첫발자국을 남긴 것은 1958년이다. 이탈리아의 리 카르도 카신이 이끄는 원정대의 두 사람이 북동 리지로 정상등정 에 성공했다. 1950년대 유럽 알피니즘을 주도하며 동계 북벽 단독 등반의 장르를 개척한 발터 보나티와 칼로 마우리에가 그 첫 등정 의 주인공이다. 보나티는 등반을 끝낸 뒤 가셔브룸4봉 등반에 대 해 “내 등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27년 동안 등반자가 없다가 1985년 보이텍 쿠르티카와 로버 트 샤우어가 서벽을 등반한다. 그들은 6일치의 식량과 연료만으 로 힘들게 서벽상단 7900m까지 진입했으나 정상까지 이어진 완 만한 트래버스는 포기한 채 북서 리지로 하산, 9박 10일간의 고통 스런 등반을 마치고 생환한다. 쿠르티카는 등반을 끝낸 뒤 “그 산 의 서벽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보나티나 쿠르티카의 말처럼 가장 험난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오 를 수 없는 험악한 산이 가셔브룸4봉이다. 보이덱 쿠르티카의 서 벽등반은 비록 정상등정을 하지 못했지만 세계등반사에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 두 번째의 등정은 1986년 미국의 그랙챠일드가 이끄는 팀이 북서릉으로 정상에 올라 첫 등정이 있 은 후 28년 만에 두 번째의 등정을 이룩한다.

1997년 가셔브룸4봉(이하 G4)서벽에서 등로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 한국대의 선전은 놀라운 성과였다. 이 산은 높이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산이다. 8000m에서 불과 75m가 모자랄 뿐 서벽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2500m 높이의 눈, 얼음, 바위로 이루어진 거벽이다. 그동안 서벽은 세계의 첨예한 알피니스트들에게 외경의 대상이 었다. 영국, 미국, 일본 등의 많은 산악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 보았으나 미답의 벽으로 남아 있었다. 1985년 이후 재등을 허용치 않던 벽이었으나 한국대가 신루트를 뚫고 등정에 성공하면서 세 계 산악계는 한국대의 성공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서구 산악계 일부에서는 믿기지 않는 의외의 성과라는 반 응도 보였다.

이 등반성과는 <아메리칸 알파인저널>에 기록으로 남겨졌고, 미 국에서 발간하는 <클라이밍>지에는 비아냥거리는 투의 기사가 실 려 우리들을 불쾌하게 했다. 미국의 산악 평론가 에드 더글라스는 이 잡지에 한국대의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연 중 눈이라곤 구경도 할 수없는 열대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의 봅 슬레이 팀이 동계 올림픽에서 우승을 한 것과 같다.” 한국대의 성 공은 뜻밖의 성과였다는 투의 비아냥거림인 것이다. 서양인들의 유색인종 깔보기 습성이 그대로 노출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등반을 비아냥거렸던 국내외의 시선
당시 한국대가 개척한 루트는 ‘코리안 다이렉트’로 명명되었지 만 등정증거 부족으로 이들의 등정결과는 외면을 받은 채 잊혔다.

1997년 한국대의 G4등반은 세계가 주목했고 평가했던 등반이지 만 증거부족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철수 중이던 허긍열 대원 이 2캠프의 커니스 붕괴로 추락하면서 등정필름이 든 배낭을 분실 한다. 당시 이 원정을 추진했던 주관단체 내부에서도 등정여부를 놓고 불신이 일자 원정대장 조성대는 갈등을 겪으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대원들 모두는 한치의 동요 없이 “그때 분명 우리는 공포의 서벽을 뚫고 정상에 섰다. 더 이상 어떤 말이 필요 하겠는가”라고 말한다. G4의 등반은 어떤 절차나 공식인정 이 필요 없다. 당시 그들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가 지닌 의미는 충분하다.

G4 등반 다큐멘터리에선 연출영화에서는 찾기 힘든 장면들이 담 겨있다. 1995년 첫 원정 때 한국원정대와 친교를 나누었던 슬로베 니아의 단독 등반가 슬라브코의 실종을 접한 그들은 2년 후 두 번 째 등반을 할 때 로프를 멘 채 눈 속에 파묻혀있는 그의 시신을 발 견한다. 하산 중이던 대원들은 고인의 가족에게 전달하려고 그의 로프를 유품으로 챙겼으나 하산 중 고정로프가 끊어지자 결국 슬 라브코의 로프를 사용하여 무사하게 내려온다. 결국 죽은 자의 유 품이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을 챙겨 준 셈이다.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죽음의 지대에서는 인간의 움직임은 모두가 드라마다.

이 영화의 주연은 부대장 유학재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 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지닌 인물이다. 내시 같은 목소리로 익살 을 부리며 주변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어려운 등반에서는 두둑한 배짱과 과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인물이다. 1988년 그 는 1시간 38분이라는 최단시간의 기록으로 토왕성 빙폭을 단독으 로 오르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으며, 1991년 필자와 함께한 백두 산 장백폭포를 초등할 때도 특유의 과감성을 발휘했다. 곧 무너져 내릴 듯 굉음을 내며 솟구쳐 오르는 낙수를 흠뻑 맞으며 물 반 얼 음 반의 빙폭을 망설임 없이 오르던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가 유학 재다.

이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황영순 대원과의 ‘오징어 사건’에 대한 대화는 흥미를 더해주는 일화다. 그는 평소 오징어를 무척 즐겨먹는다. 광적일 만치 오징어를 즐긴다. 기호식으로 즐겨먹을 뿐만 아니라 밥 대신 주식으로 2~3일씩 오징어만을 상식할 때도있다. 특히 등산 중에 오징어를 주식 대용 으로 먹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오징 어는 소화흡수가 잘되지 않아 위속에 오래 머물러 포만감을 충족시켜 줄뿐만 아니라 칼로리 함량도 높다고 한다. 또한 쉽사리 부패하지 않고 부피와 무게가 작아 휴대가 간편하다는 이점 때문에 등산식품으로 최고 의 장점을 지닌 먹을거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G4원정에서도 그는 대장 몰래 100마리의 오징어를 구입하려다 대원 실수로 1천 마리를 사는 바람에 대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한 치기어린 시퍼런 청춘이었다. 지금 그는 대학생 딸을 둔 50 대 초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그는 영화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오지 탐사대를 이끌고 지구반대쪽 침보라소(Chimborazo·6310m)로 떠났다. 지금쯤 에드워드 윔퍼의 족적을 따라 침보라소를 오르며 오징어를 씹고 있을 것이다.

 
16년이 흐른 뒤, 삶과 죽음으로 남은 대원들
1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원정대장 조성대와 황기룡은 이미 저 세 상 사람이 됐다. 대장 조성대는 필자와 오랜 교분을 나눈 후배다. 그가 불신의 벽에 갇혀 고민할 때 마땅한 위로의 말도 해주지 못했 다. 이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홀연히 떠나버린 그가 그리울 뿐이다.

황기룡은 2010년 네팔 파리랍차(6017m)에서 등정을 끝내고 유 학재와 함께 하산 중에 사망했다. 그들은 천상에서 자신들이 출연 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를 보고 있을 것이다. 혈기 넘쳐나던 나 머지 대원들은 새치 듬성한 40~50대가 되어 각자 나름대로 삶의 터전에서 자기의 둥지를 가꾸어 가고 있다. 이제 그들 앞에는 끝 나지 않은 또 다른 등반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건 삶이라는 또 다른 가셔브룸4봉이다.

1997년 여름 G4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 영화를 관람해 보면 안다. 만년설 덮인 히말라야의 냉기가 무 더위를 식혀줄 청량제 구실을 할 것이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여 오랫동안 상영관의 스크린을 비춰주었 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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